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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상식
국토통일원,
과거로부터 통일의 미래를 묻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1969년 3월1일 국토통일원 개원식에서 부처 이름이 적힌 현판을 보고 있다.
지난 9월 27일(금),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된 ‘2024 원코리아국제포럼’과 다음날인 28일(토),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개최된 ‘2024 코리안드림 통일실천대행진’에서 문현진 글로벌피스재단 세계의장이 공통적으로 강조했던 것은 ‘통일부 혁신’과 “국토통일원처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초당적 통일기구로의 회귀”였다.
코리안드림 타임스는 이번 10월 호와 다음 호에 걸쳐 국토통일원과 관련한 특집기사를 통해 민관(民官)이 함께하는 초당적이고 범시민사회를 모두 아우르는 통일준비기구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고자 한다.
지난 9월 28일(토),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서 개최된 ‘2024 코리안드림 통일실천대행진에서 기조연설 중인 문현진 글로벌피스재단 세계의장
‘1부 : 국토통일원을 만나다’에서는 국토통일원과 관련한 전반적인 개요, 발족 당시 국내외 정세 분석 등을 통해 국토통일원의 성격과 목적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부 : 과거로부터 미래를 묻다’에서는 1부에 이어 국토통일원의 변천사와 그 안에 담긴 의의와 한계점, 끝으로 문 의장이 강조했던 민관이 함께하는 초당적, 범시민 사회적 통일준비기구에 대한 고민을 통해 코리안드림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 운동의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국토통일원 발족
1969년 3.1운동 제50주년 기념일에 발족한 국토통일원 당시 전경
■ 국토통일원 개요
국토통일원은 1967년 2월, 통일문제를 종합적이며 전문적으로 다룰 정부 내 전담 기구 설치안을 국회에서 채택한 이후 1969년 1월 국토통일원직제 공포를 통해 같은 해 3월, 3.1운동 제5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개원했다.
표면적으로 국토통일원 발족의 가장 큰 목적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염원과 줄기찬 의지에 바탕을 두고 통일에 대비한 범국민적 역량을 결집, 통일 과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데 있었다.
설립 초기 국토통일원은 서울대 총장과 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한 신태환 초대 장관을 중심으로 기획조정 업무를 담당하는 기획관리관, 북한 제반 실태 및 다른 분단국, 공산권 통일 문제를 조사, 분석하는 조사연구실, 대내외 통일 기반 강화를 위한 교육홍보실, 통일문제와 관련한 자료수집 및 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자료관리국 등을 주요 부서로 두고 대한민국 정부 설립 이후 첫 통일문제 전담 국가기구로 출범하였다.
■ 국토통일원 성격
국토통일원 시기 대민 통일 홍보 및 교육을 담당했던 통일연수소 전경
국토통일원은 설립 당시 현재 대북 관련 업무에 집중하는 통일부와는 성격이 매우 상이했다. 이 당시 대북 관련 업무는 중앙정보부 및 외교부가 전반적인 실무를 담당했고, 국토통일원은 북한 제반 실태, 분단국, 공산권 통일 관련 자료 조사, 분석을 통한 통일 관련 방안을 제시하는 연구기관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이는 국토통일원직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가장 많은 내용으로 구성된 조사연구실직제에서는 “북한의 각 분야에 관한 조사, 연구 결과 종합‘, ’북한과 관련한 국내외 연구기관 및 전문가와 협조‘, ’통일과 관련한 정세평가‘, ’통일 정책과 관련한 연구 분석‘ 등 연구기관 업무를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토통일원은 이처럼 조사연구실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연구 성과들을 대내외 통일 환경 기반 조성을 위해 설립된 통일연수소(통일교육원 전신)을 통해 사회 각계 지도층 및 시민들을 ‘통일꾼’이라는 통일 지도 세력으로 육성하는 교육 및 홍보자료 등으로 집중 활용했다.
이밖에 통일문제와 관련한 초당적, 범국민적 의견을 수렴하고 평화통일 의지 고취를 위하여 통일정책을 자문하는 기구인 ‘국토통일고문회의’를 산하 기구로 설치해 통일과 관련한 외부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자 했다.
■ 국토통일원 특징
통일원 장관 모임에 참석한 이용희 장관(아래 가장 우측에서 두 번째)
국토통일원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대북 관련 실무를 담당하던 중앙정보부와 외교부 등이 군인, 공무원 집단 등으로 구성된 것과 반대로 전문성을 지닌 민간 연구직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었다.
국토통일원은 한국 국제정치학의 비조(鼻祖)로 불리는 6대 이용희 장관 시기(1976년~1979년)부터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실질적인 방향을 도출할 목적으로 해당 분야 연구 및 분석이 가능한 민간 인력들을 대폭 채용하는 쇄신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
훗날 통일부 장·차관을 역임한 정세현, 조건식, 김형기 등의 인물이 이 시기 신진 연구 인력으로 국토통일원에 영입되었다. 4.19혁명 당시 대학을 다닌 이들 신진 인력들은 기존 중앙정보부 및 외교부 실무자들과 다르게 민간의 입장에서 통일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
쉽지 않은 길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여당은 국토통일원을 통일 정책을 연구하고 실제 집행하는 기관으로의 역할보다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통일을 위한 ‘정신 국력의 조직화’ 기능을 담당해 주길 강조했다.
반대로 야당은 연구기관의 수준을 넘어 분단된 두 조국의 교류 사업을 고유의 행정 권한으로 직접 연구, 설계, 집행하는 서독의 ‘내독관계성’과 같은 역할을 담당해 주길 주문했다.
이용희 당시 국토통일원 장관은 과거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국가의 대사(통일)를 두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구시대적 정치 세력들의 통일 놀음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에게 허용된 운신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고, 당시 전반적인 분위기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남북 관계가 오히려 교착되면서 국토통일원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이 확산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점 하나는 당시 민간에서 확산하고 있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가 당시 취할 수 있었던 방법은 민간 전문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며 대북 연구기관으로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준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민간과 협력한다는 데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이 장관의 노력으로 당시 터부시되며 민간은 감히 접근조차 꿈꿀 수 없었던 ‘대북’, ‘통일’이라는 분야의 빗장이 조금씩 개방되었고,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통일론’이 일부지만, 국가 통일 정책의 한 분야로 반영되기 시작했다.
[2] 국토통일원 설립 배경
1960년 4.19혁명은 남한 내 통일에 관한 여론을 기존 무력 통일에서 평화통일로 바꾸는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 1960년대 확산한 민간 차원의 통일 염원
1960년, 4.19혁명 이후 정당, 사회단체 등을 중심으로 통일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이 시기 대표적으로 제기된 통일논의는 크게 (1) ‘유엔 감시하 인구 비례에 의한 자유 총선거’, (2) ‘혁신계 중심의 중립화 통일론’, (3) ‘민족자주통일협의회가 제시한 남북 협상론’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기 통일 담론의 특징은 학생들이 통일의 주역으로 직접 통일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1960년 9월 24일~25일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학생위원회가 주최한 ‘전국대학생시국토론회’,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 등은 대학 사회 및 시민사회에 ‘민족자주 평화통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통일 담론의 등장 배경은 1960년대 당시 경제적 피폐와 정치적 불안에 의한 고통이 모두 ‘분단’에 원인이 있다는 점과 함께 빈곤에서 탈출하여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통일’이라는 사회적 인식에 기인했다.
■ 북한의 ‘상층 통일전선 구축’ 전략
4.19혁명 이후 진보 계열의 제도권 재등장과 함께 북한의 한반도 통일 전략도 김일성의 지시 아래 소극적 입장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남한에서 4.19혁명으로 진보 계열이 제도권에 재등장하자 북한은 기존 ‘소극적 민주기지노선’에서 벗어나 남한 진보 계열과의 협력을 중심으로 북한식 통일론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상층 통일전선 구축’ 전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실제 북한은 1960년 4월 27일, 민주당을 비롯한 남한 주요 정당 및 사회단체지도자들에게 연석회의를 제안했고, 1961년 5월 13일에는 통일문제를 전담하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약칭 : 조평통)를 결성, 5.16쿠데타 이전까지 남한 내 주요 정치, 사회, 대학 내 진보 계열에게 남북한 문화교류를 통한 통일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신한반도 평화통일 구상
박정희 정권은 1964년 후반부터 통일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재기하며 8.15 평화통일 구상선언을 발표했다.
1961년 발생한 5.16쿠데타 이후 1964년 후반부터 박정희 정권 내에서 통일에 관한 논의가 다시금 활기를 되찾았으며,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8.15 평화통일 구상선언’은 다음과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나온 한반도 평화통일 구상이었다.
(1) 냉전 완화 분위기 : 미·소, 미·중 간의 데탕트로 인해 긴장이 완화되는 동시에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안보 공백 우려로 인해 평화적 환경 조성 필요했다.
(2) 경제 발전 자신감 : 1960년대 후반까지 성공적인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북한을 경제적으로 추월함으로써 남한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자신감을 획득했다.
(3) 내부 결속 : 통일이라는 거대 담론을 통해 국민들의 관심을 하나로 집중시키고 이를 통한 결집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안정 도모, 이외에도 북한의 상층부 통일전선 전략을 억제하고 남한 중심의 평화통일 전략 확산시키고자 했다.
(4) 북한 도발 억제 : 1960년대 후반부터 지속된 북한의 비정규 군사도발을 억제하기 위한 차원에서 평화적 통일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고 이를 통한 지지와 협력을 도모하고자 했다.
(5) 국제사회 지지 : 4번과 연결되는 것으로 남한의 평화적 통일 의지를 적극 홍보, 국제사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동시에 한반도 통일에서 보다 큰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번 다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 한반도의 장래에 관한 문제는 열강이나 국제 조류가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체적인 노력과 자주적인 결단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민족의 주체성을 견지하고 변천하는 세계 조류에 능동적이고 신축성 있게 대처해 나가면서 평화적인 국토통일의 길을 다져 나가야 하겠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 1971년 8.15 경축사 중에서”
[2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 참고 문헌(연도순)
국토통일원. 국토통일에 관한 논문집. 서울: 국토통일원, 1971.
김성호. “초대석:전 국토통일원 장관 신도성 박사-통일조국의 비전 제시로 국민적 관심 높여야.” 북한 -.170 (1986): 102-105.
국토통일원. “일부 야당의 통일분야 정강정책에 대한 정부의 견해.” 북한 -.186 (1987): 170-175.
李元達. “大學附設統一問題硏究所의 運營現況과 改善方向.” 統一問題硏究 13.- (1988): 67-81.
최봉기. “통일문제연구의 관학협동 관계.” 統一問題硏究 13.- (1988): 125-131.
평화문제연구소. “소식 : 이홍구 국토통일원 장관 청와대에서 업무보고 -“동포애적 북한관 정립에 노력”.” 통일한국 52.- (1988): 17-17.
이주봉. “1960년대 정치세력의 통일논의 전개와 성격.” 국내석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9. 서울
이미혜. “다중흐름모형을 적용한 통일교육정책 변동과정 분석: 통일‧안보지향 통일교육으로의 변동을 중심으로.” 북한연구학회보 22.2 (2018): 171-201.
장세진. “미완의 싱크탱크 혹은 이용희의 국토통일원 시절(1976~1979)-1970년대 후반 국토통일원의 연구 사업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65 (2022): 329-372.
이미혜. “다중흐름모형을 적용한 통일교육정책 변동과정 분석: 통일‧안보지향 통일교육으로의 변동을 중심으로.” 북한연구학회보 22.2 (2018): 171-201.